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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트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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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트 스포츠는 1300년대 중세 영국 군인의 오락으로 시작되었으니 최소 70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다트 게임의 기반이 되는 날카로운 물체를 목표물에 조준하여 명중시키는 개념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화살, 칼, 창 같은 물건을 나무 줄기나 테이블에 던지는 게임은 있었습니다. 무기의 원래 용도에서 벗어나 재미로 즐기기 시작하면서 게임이 됩니다.

다트가 대중적인 군사 오락으로 떠오른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병사들이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기 위해 뒤집힌 와인통이나 나무의 단면 나이테를 겨눴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긴 창이나 짧은 표창 같은 날카로운 물체를 게임에 사용했습니다. 영국 군에서도 조준과 투척 기술을 단련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런 게임에 참여를 장려했다고 합니다.

게임 참가자들은 일정한 규칙을 정립하고 둥근 모양의 나무에 새겨진 점수판을 개선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의 자연적인 나이테는 지금 우리가 보는 다트 보드의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진화를 거듭하다가 토너먼트용 스포츠로 발전합니다.

다트 화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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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니콘사가 1937년 발매한 3개 세트 Silver Comet 레플리카. 3개를 던지는 1스로 룰을 만든 현대 다트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유니콘다트

다트 발상지 영국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지금의 다트와 비슷한 놀이가 등장한 것은 15세기 후반입니다. 프랑스와 벌인 100년전쟁과, 장미전쟁 중에 병사들이 고안해 냈다고 하죠. 부러진 화살을 와인 통에 넣는 내기, 영국식 투호라고 할까요. 그래서 다트에서 누가 먼저 던질지 결정하는 단어 콜크(cork)가 와인통 마개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100년전쟁 가운데 영국의 역사적 승리로 유명한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서, 영국과 웨일즈의 소규모 군대가 짧은 창과 칼로 무장한 6배 규모의 프랑스군을 순수하게 활로만 물리칩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궁수들은 화살을 과녁에 던지는 훈련을 하면서 양궁의 원조가 되었고, 나중에 작은 다트로 변했다는 설입니다. 양궁 종주국인 영국은 다트를 아처리(Archery)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프랑스 피카르디(Picardy) 지역에서 지금도 대회를 하는 'Javelot tir sur Cible(자벨롯 티르 쉬르 시블)'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조류의 깃을 단 플라이트와 금속 앞부분이 다트와 비슷합니다. '자벨롯'은 강철 끝에 칠면조 깃털뭉치를 아주 작은 불스아이만 있는 과녁에 던집니다.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기 전 가볍고 짧은 창을 구사하는 '자벨로티에(표창 부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는데, 그 무기가 다트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트의 역사는 2200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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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Javelot tir sur Cible. ©gazettesports

그보다 더 오래 전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트 화살의 원형은 기원전 500년 그리스 병사들이 쓰던 플럼바타(Plumbata)라는 주장입니다. 창을 축소한 이 무기는 납을 배럴로 써서 무게를 더했고 나무 샤프트에 금속 플라이트를 갖추었습니다. 전투용 방패 뒤에 플럼바타를 꽂고 근거리 공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트가 아니라 다트형 무기라고 표기하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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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엔스에서 발견된 서기 4~5세기의 플럼바타 4개. 나무 샤프트는 썩어서 보이지 않는다.
©wikipedia

다시 100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돌아와…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고 와인통마저 귀해지자 통나무를 잘라 화살을 꽂고 놀았습니다. 헨리 7세의 랭커스터 가문이 장미전쟁에서 승리하며 영국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선술집(pub)에 몰려가 ‘군대의 추억’을 나눴고, 그때의 표적 맞히기 놀이를 펍에서 되살립니다.


영국에서 펍은 술집이라기보다 마을공동체 성격이 강합니다. 겨울이 길고 해가 일찍 지고 비가 잦은 날씨는 사람을 실내에 머물게 하고, 좁은 곳에서도 가능한 이 놀이가 인기를 끕니다. 펍 주인들은 손수 만든 보드를 벽에 걸고 손님을 유치했고, 이때부터 다트와 펍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다트’라는 단어가 게임으로서 처음 언급된 것은 1819년에 영국의 저널이 ‘퍼프앤다트(Puff and Darts)’라는 게임을 소개할 때입니다. 속이 빈 대롱에 화살을 넣고 나팔을 불듯이 힘껏 불어 양궁 타깃 모양의 동심원을 향해 다트를 날리는 것입니다. 이 게임도 펍에서 즐겼다고 하는데, 1844년 런던의 한 펍에서 이 게임을 하던 사람이 불지 않고 흡입하는 바람에 화살이 폐에 들어가 사망합니다. 이 위험성 때문에 퍼프앤다트는 ‘입으로 불기’에서 19세기 말에 지금의 다트 ‘손으로 던지기’로 변모했다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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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놀이로서 Darts란 단어를 처음 쓴 게임 Puff And Darts
©patrickchaplin

다트는 생긴 것도 유래도 무기가 맞습니다. 창은 나중에 등장하는 활과 화살에게 존재 가치를 빼앗깁니다. 동물을 잡든 적군을 죽이든 창은 살상무기였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축소되어 손가락으로 다룰 수 있을 만큼 작은 무기가 됩니다. 스포드 사전도 다트를 ‘작은 미사일’이라고 설명합니다. 현대에 와서 다트는 서로를 겨누지 않고 보드를 목표로 실력을 겨루는 도구로 변화했습니다. 전쟁 도구가 스포츠 용품이 된 셈입니다.

다트 보드의 역사

이제 다트 보드는 어떻게 생겨났을지 알아보겠습니다. 전쟁 중에 와인통 안에 부러진 화살을 넣으며 놀다가 다음은 나무를 자른 면 위에 꽂았고, 나이테가 마르면서 생긴 균열이 자연스럽게 점수 구역으로 나누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후대 사람이 지어낸 말일 뿐, 양궁 표적처럼 중심에 가까워야 유리한 활쏘기 놀이였습니다.


영역을 구분한 다트 보드가 발명된 것은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입니다. 바깥쪽으로 선을 긋고, 구역마다 점수를 구분한 다트 보드의 원형이 이때 생깁니다. 이를 통해 채점이 가 능해지면서 우열을 가려야 하는 스포츠로서 기본을 갖추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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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ts in England, 1900–39

펍에서 유행한 다트는 펍의 마케팅 도구가 됩니다. 펍 주인들은 각자 설계한 보드를 걸고 손님을 유치합니다. 나무를 원 모양으로 자르고 방사형으로 선을 긋거나 철사로 갈라 구역을 나눴습니다. 영역 크기와 점수 매기는 방법은 다 달랐습니다.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또는 재미를 더하기 위해 더블 구역을 만들고, 나중엔 트레블을 만들고, 불도 두 개로 나눕니다.


보드의 이름은 보드가 처음 걸렸던 펍의 지역명을 붙이기도 하고, 그 보드가 제작된 목공소의 위치로 보드를 구분했습니다. 골동품 수집가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영국 시골을 찾아다닌다고 하네요.


그림스비 보드는 세그먼트가 지금보다 많은 28개로 촘촘했고, 입스위치와 런던5는 5, 10, 15, 20만 3번 반복해 모두 12개 구역밖에 없습니다. 더블과 트리플 링 폭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맨체스터, 요크셔, 켄트, 링컨 지역 보드들은 트리플 링이 없었습니다. 턴브리지 보드 또한 독특합니다. 더블링 안쪽에 뾰족한 삼각형을 두어 트리플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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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1900년대 초반 다트 보드들. 쿼드로240은 해로우즈가 재미로 만든 이벤트용 다트.

런던 보드 또는 클락 보드라고 부르는 현재 보드에 있는 트리플 링은 192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표준은 요크셔 보드였습니다. 트리플이 없고 불도 2개로 나누지 않고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트용품 업체인 해로우즈는 1992년에 QUADRO240 보드를 내놓는데 트리플과 불 사이에 4배를 주는 쿼드러플 링이 있습니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보드는 이렇게 다양하게 변합니다. 영국에서는 클래식 보드를 걸고 전통 다트를 즐기는 이벤트가 많이 열립니다.


다트 보드는 오묘합니다. 높은 점수 옆에 낮은 점수가 붙어 있습니다. 제로원 게임에서 피니시를 할 때는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이 절묘한 ‘숫자 배열’은 누가 창안했을까요. 게임을 할수록 탄복하게 하는, 현재의 숫자 레이아웃을 누가 창안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분분합니다.
구글에서 다트 역사를 검색하면 대부분, 1896년에 영국 목수였던 브라이언 갬린(Brian Gamlin)이 현재와 같은 보드를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네이버 지식사전이나 위키피디아도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갬린의 출생지인 영국 랭커셔의 뷰리 지방에는 그런 목수가 살았던 흔적이 없습니다. 다트 역사학자인 패트릭 채플린 박사가 25년 동안 추적했지만 갬린의 후손이나 어떠한 자료와 참고인도 찾지 못했습니다. 브라이언 갬린이란 이름은 1970대 초에 거론되기 시작하는데 입과 귀로만 전해지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우세합니다.


이를 뛰어넘는 유력한 창안자가 있습니다. 오크셔에서 활동한 토마스 윌리엄 버클(Thomas William Buckle)입니다. 1992년 다트 전문잡지 <다트 월드>에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그의 아들이 인터뷰에서 지금과 똑같은 숫자 배열에 더블링만 있는 보드를 아버지 버클이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버클의 직업은 철사 세공 기술자였습니다. 1910년 집 지하 작업장을 ‘보드 메이커’로 카운티에 등록했고, 네덜란드산 느릅나무에 숫자와 영역 구분선을 철사로 고정해 드워즈버리 지역의 술집에 팔았습니다. 처음엔 5, 10, 15, 20이 3번 반복되는 파이브 보드를 만들다가 1913년에 20개 영역의 지금 같은 배열로 바꾸었습니다.


버클의 보드는 ‘요크셔 보드’로 불렸고, 1918년과 1924년 사이에 트리플 링과 싱글 불이 추가되어 지금 같은 모양이 됩니다. 1925년 영국다트협회(NDA)가 발족하면서 공식경기용 보드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래서 ‘런던 보드’라고 부르고, 12시 자리에 최고점인 20을 배치한 뒤 1부터 시작한다 하여 ‘클락 보드’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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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트보드 회사 윈마우가 재현해 판매하는 요크셔 보드. 그 창안자로 알려진 토마스 윌리엄 버클.

이같은 교묘한 숫자 배열은 윌리암 버클이 하루아침에 결정한 것이 아니고, 영역이 확대되고 배수 적용 구역을 늘리고… 게임을 거듭하며 진화한 것입니다. 이 정도 레이아웃이면 완벽하게 재미있는 게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때의 것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숫자 배열법이 나오고, 사람들이 많이 즐기게 된다면 언젠가 또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100년 넘게 이어온 현재의 보드를 뛰어넘지는 못할 겁니다. 스포츠의 세계는 의외로 보수적이어서 룰 하나 고치는 데도 수십 년이 걸릴 만큼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